





Covid-19 팬더믹이 발생하기 몇 개월 전, 나는 이주민들의 인물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팬데믹 이후 서구권에서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 범죄가 만연했고 내가 한국에서 만난 이주민 활동가들은 인종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경험했다.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의 포용성을 질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수십 년간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단일민족이라 여겨왔다. 단일민족론은 1945년 이후 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당시 역사학자들이 민족의 순수성과 자부심을 강조하며 시작되었다. 2007년 UN 인종차별위원회는 한국 사회에서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같은 해 단일민족이라는 표현은 교과 과정에서 사라졌다.
2023년의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이 한국이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라고 답했다. 인구 감소로 이주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설문에는 대다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또 다른 설문에서는 다수의 응답자가 이주민 증가가 사회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응답했다.
단일민족과 순혈주의가 강조되었던 시기을 지나 이제 우리는 다문화 사회를 말한다. 하지만 이주민과 선주민이 같은 사회공동체로서 어우러지 않는다면, 그리고 선주민이 이주민을 노동력 보충이나 지방인구증가같은 기능적 목적만을 생각한다면, 미래에 많은 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존엄성과 보편적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려야 하는 이유이다.
이주민들은 공식적으로 비숙련 외국인력, 재외동포, 결혼이민자, 외국인 유학생, 이주배경청소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탈북민, 인도적 체류자 등으로 불린다. 하지만 이들 개개인은 이러한 분류보다 훨씬 다양한 삶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어디에서 왔고 무슨 일을 하든 이들 모두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다.
A few months before the COVID-19 pandemic began, I embarked on a project to photograph migrants. After the pandemic, while hate crimes against Asians have been rampant in the West, migrant activists I have met in South Korea have experienced racism and unfair treatment. This has led me to question inclusiveness in my series
For decades, Koreans have viewed themselves as a homogenous nation. This belief originated in the post-1945 nation-building era when historians emphasized the pride in the nation’s ethnic homogeneity. In 2007, the UN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Racial Discrimination expressed concern about the principle of the “pure-blooded” in Korean society, and that same year, the term "homogenous nation" disappeared from school textbooks.
In a 2023 survey, half of the respondents stated that Korea is not a homogenous country. While the majority responded positively to the idea of accepting migrants due to declining populations, another survey revealed that a large number of respondents believe that an increase in migrants will intensify social conflict.
After a period of focusing on mono-ethnicity and traditional pure-blood customs, Korean media are now discussing the concept of a multicultural society. However, if migrants and natives do not integrate into the same social community and if natives only view migrants in terms of practical benefits—such as filling labor shortages or increasing the local population—many problems and conflicts are likely to arise in the future. This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listening to their stories, recognizing them as human beings with dignity and universal rights.
Migrants are officially categorized as unskilled foreign workers, overseas Koreans, marriage immigrants, foreign students, youth from migrant backgrounds, undocumented migrant workers, North Korean defectors, humanitarian residents, and so on by the goverment. However, each of these individuals has a much broader range of values and life experiences than these labels suggest. Regardless of their origins or roles, they are all members of the social community living in the present.
방글라데시 출신 Sajdarun Nessa는 처음에 비숙련 외국인력 비자로 한국에 왔다. 방글라데시에서 방송국 조연출과 성우, 연극배우 경력이 있는 니샤는 여성으로서 한국에서 자신을 꿈을 펼치며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로 일하는 자신에게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질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로 돌아간 후에도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니샤는 몇 년 후 유학생 비자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주노동자와 유학생로서 한국에서 살아본 니샤는 두개의 다른 눈빛을 경험했다. 이주노동자인 자신은 그저 가난한 나라 사람이었고 유학생이 되자 부자집 자녀로 여겨졌다. 이주노동자로 일할 때는 고용주가 법에 무지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업무외에 다른 일도 떠넘기려 했으나 유학생신분으로는 그러한 부조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니샤는 학업과 아르바이트 외에도 이주민 인권을 위한 공연활동도 하고 있다. 바쁜시간에 굳이 인권활동도 하는 이유는 자신이 경험한 부조리한 일이 사라지길 바래서이다. 또한 목적과 의미를 상실한 인생보다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니샤는 대다수의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공장에 가거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앞으로 NGO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4)
Ke Ravin은 캄보디아에 온 23살 이주노동자이다. 현재 양계장에서 일하지만 얼마전 까지는 농장에서 일했다. 그가 전에 일하던 농장에서는 비밀하우스와 판넬로 만든 숙소에서 이주노동자를 지내게했다 . 비닐하우스 숙소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반인권적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2020년 한 이주노동자여성이 겨울에 건강악화로 사망한 후 법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고용주들은 법의 허술한 점과 이주노동자의 불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비닐하우스에 숙박비 명목으로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을 임금에서 공제한다. Ke Ravin 역시 숙박비 명목으로 1350만의 임금을 체불당한다. 한국말이 서툰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더 큰 불이익을 걱정하여 이러한 노동력 착취를 감수하지만 그는 고용주에게 임금체불을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2025년 Ke Ravin는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지구인의 정류장'의 도움으로 고용노동부에 사건을 진정하였다. 현행법상 임금체불 시정지시에 따르지 않은 고용주는 3년이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으나, 많은 고용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의 불리한 상황을 이용하여 체불액보다 훨씬 적은 금액에 합의를 요구한다고 한다. (2025)
Nell Fox는 주한미군에서 근무하던 10여년 전부터 홍대에서 벌라스크 공연을 해왔으며 현재는 WhiteLies BurlesqueRevue 라는 퍼포먼스 그룹의 리더이다. 성과 몸 긍정주의를 바탕으로 무대를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의 무대는 트렌스젠더든 보수적인 기독교신자든 상관없이 모든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그들은 공연을 통해 외모와 성적 태도에 대한 편견에 도전하며, 모든 몸은 아름답고 모든 공연자는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줘 관객에서 용기와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021)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형식적인 완벽함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리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서 다른 문화를 경계하고 적응을 강요하는 것은 고유한 것을 지워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북한 출신 연극배우 김봄희는 스스로를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소개한다. 한국에 처음와서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는 서울시를 돌아다니며 노숙하였다. 당시를 뜨는 해와 지는 해에 감사할 수 있었던 나쁘지 않은 경험으로 기억한다. 현재 자신의 극단을 운영 중이다. ' 예술인도 사람이다'를 강조하며 배우와 스태프들이 상처받지 않는 예술을 하고자 한다. 소수자로서 사회와 융합하고자 하는 개인에게 관심을 기울려, 언어로서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 관객에서 체험하게 하는 공연을 추구한다. 그의 바램은 탈북민, 여성, 아내, 며느리와 같은 타이틀에서 벗어나 인간 김봄희로서 살아있는 감정을 자유롭게 해방하는 것이다. (2021)
Bujhel Sirjana(시루)는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이다. 청주에서 축산업 공장에서 일했으나 회사 이사의 인종차별적 폭언과 동료직원과의 갈등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E-9 비자의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툰 시루가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길 원하자 비자를 취소하고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다행히도 이주민인권활동가들이 상황을 중재해서 새로운 직장을 찾을 수 있기 되었다. 현재 미루가 있는 이주민쉼터에서 임시거처하며 새로운 일을 찾고 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시루는 발전한 한국에도 나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한다.. (2025)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는 기계같은 사람이 지만 마음은 새처럼 자유롭게 나는 것을 꿈꾸고 있다.” Mondal Narayan Chandra는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들이자 이주민 인권활동가들이 결성한 다원예술 공연팀 Frame 2의 멤버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한국에서 공연팀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꿈을 이루고 자신감을 얻 었다고 한다.(2021)
Gurung Itika(I마야)는 15년전 네팔에서 결혼이민자로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대구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초등학생 아들과 오산에 거주한다. 마야는 여성센터에서 머물렀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주민 쉼터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말이 서툴어서 고용주와의 분쟁과 병원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이주노동자들의 통역과 상담을 맡고 있다. 마야가 있는 이주민 쉼터에는 직장이 문을 닫거나 임금체불로 일을 그만둔 이주노동자들의 임시거처이다. 네팔인들이 많이 있지만 방글라데시와 태국에서 온 노동자들도 있다고 한다. 마야는 쉼터의 언니같은 존재이로 숙소의 관리자이자 상담사이다. 마야의 존재로 쉼터에 모인 이들은 네팔음식을 요리를 함께하는 등의 친밀한 생활이 가능해졌다. (2025)
미얀마 출신인 Khin may thar는 수원이주민센터 대표이다. 93년에 한국으로 유학온 후 현재까지 이주민여성으로 살고 있다. 수원이주민센터에 나와 봉사를 시작한 건 2014부터이다. 영어선생님으로 활동했는데 당시에는 주말에도 나와 봉사했고 미얀마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는 단체의 대표이자 이주민 여성리더로서 여성, 노동자, 청소년 이주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고자 지자체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킨메이타에게는 이주민센터 활동으로 생긴 신념이 있다. 이주민, 선주민의 구분은 없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주민 사이의 구분도 없어져야 한다. 국적, 인종, 종교의 차별없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신으로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과 힘을 합쳐 단체를 이끌어왔다. 킨메이타는 미얀마인들을 보기 힘들던 시절부터 한국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소수의 국적을 지닌 여성들에게는 각별한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그 중 한국에 오기전 선생님이었던 이들에게는 강사로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2021년 미얀마 군부 쿠테타 후에는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인들과 함께 민주화 시위를 조직했다. 미얀마인들은 지금도 한국인들과 연대하여 현지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의 바램은 미얀마 상황이 나아져 블랙리스트에 오른 미얀마 동포들이 무사히 귀국하는 것이다. (2024)
결혼 이주민인 아마리 미호는 일본에서 락밴드 보컬로 활동했다. 2007년 도쿄의 라이브 클럽에서 밴드뮤지션인 이찬욱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밴드를 결성한다. 이찬욱과의 결혼 후 한국으로 이주하였으나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 한국 관객들이 일본인인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걱정으로 몇 년간은 제대로 된 공연을 하지 못했다. 어쩌다 우연히 참여한 야외 공연에서 관객들이 공연을 자유롭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고, 그때부터 그녀도 마음을 열고 공연을 온전히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주민으로서의 경험은 아마리 미호에게 이주민 인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그녀는 이주민 인권 행사를 공연으로 지원하며, 다양한 나라에서 온 결혼 이주민 여성들과 공감대를 나누는 데 큰 기쁨을 느낀다. 그녀의 바램은 국적을 넘어 지구인이라면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음악을 공연하는 것이다.

"난민은 돈 벌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Black and Grey Music 은 2018년 예멘난민 신청자로 제주공 항에 도착한 세 명의 예멘 청년들이 만든 힙합 뮤지션이다. 거친 언어로 예멘 및 주변 국가들의 부패한 종교, 정치적 상황 과, 임시체류 자격으로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음악과 뮤직비디오 제작을 포함하여 모든 작 업은 휴대폰 하나로 이루어진다. 리더 El Godfather는 영상제 작자이기도 하며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영상을 감독했고, 현재는 예맨인들이 경험하는 인종차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블랙 앤 그레이 맴버들은 전국 이곳 저곳에 흩어 져서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며 가끔식 어렵게 시간을 내어 만 나 함께 음악을 만든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난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Black and Grey Music Hadeel a.k.a [ Scorpion ]
Black and Grey Music Yousef a.k.a [ El Godfather ]
Black and Grey Music Akram a.k.a [ Al Kaz ]
Ragchaasuren Unurjargal(라오너)는 몽골에서 온 결혼이민자이다. 2008년에 남편을 따라 한국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지만 모계문화가 강한 몽골과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을 만나고 싶어 봉사활동에 참여하다가 다문화센터에서 몽골사람들을 만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센터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과 협동조합과 공연팀을 만들었다. 한국무용 자격증도 얻고 태국, 미얀마등 다양한 국가의 춤을 연습했다. 국적이 다른 멤버들이 여러 나라의 춤을 공연하는 것에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지만, 국적이 달랐기에 오히려 편견없이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때 1년에 80회 공연할 정도였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공연이 중단 된 후로는 계속되지 못했다. 지금은 이주여성들이 현실적으로 수익을 올려 자립할 수 있는 의료사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라오너가 품고 있는 미래의 꿈은 노년이주여생들의 공동체로서 국제요양원을 설립하는 것이다. (2024)
Tsoy Yana는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다른 고려인 십대들과 달리 한국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어 학당에 다니기도 했다. 마침 한국 정부의 고려인 방문 프로그램이 시작되어 다른 고려인학생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몇년 뒤 대구대에서 유학하여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학습했고 서울에서 석사 학위까지 마쳤다. 학생 시절, 야나는 한국어를 배우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인과 중국인 유학생은 물론 같은 카자흐스탄 출신 유학생들보다도 학습 속도가 느려 힘들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러시아어가 한국어와 언어 체계가 완전히 달라 더 어려웠다는 것을 깨닫고 아쉬움을 느꼈다. 다른 유학생들처럼 야나도 졸업 후 취업문제로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고려인센터에서 동포들을 돕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몇 년 뒤 안정적인 직장으로 이직했다. 야나는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소속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인들을 ‘동포’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고 한다. 야나는 시간이 날 때 단편 영화를 제작한 적도 있다. 소개팅에서 자신에 대한 질문은 거의 없고 카자흐스탄과 고려인에 대한 질문만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코미디물이라고 한다. 언제나 자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원하며, 단편 영화 제작뿐 아니라 이주민 단체의 공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25)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기 전, Samadi Abdul Fahim은 바그람 기지 한국병원의 부원장이었다. 당시 바그람 병원에서 일하는 이들은 테러의 위협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자살폭탄테러 현장에서 두 아들을 지키려다 희생당하였다. 탈레반의 카불 점령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가족들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하여 특별기여자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한국에 오면서 경력과 사회적 지위, 재산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의사자격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별기여자들을 생산직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현대중공업 선박 엔진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상상이상의 노동강도에 당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성실함을 인정받았고 이직을 결심했을 때는 회사에서 계속 일해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후 리서치 회사에서 일했지만 회사가 부도가 나 실직하게 된다. 현재는 수원에서 새로운 경력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의사로서 오랜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낯선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삶은 고통스럽지만, 가족의 안전을 보장해 준 한국인의 친절함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의사로서 자격을 인정받길 바라는 강한 소망을 품고 있다. (2024)
Samadi Atefa는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할 때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배우자인 Samadi Abdul Fahim가 군 캠프내 병원의사였기에 특별기여자로 함께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과 친척들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다. 가족 중 여성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제한되고, 외출 시 얼굴을 가려야 하는 등 여러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언어, 문화, 음식의 차이 때문에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도 생기고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갔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가족들과는 자주 연락하며 안부를 묻고 있다. 카불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그녀는 5년간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다. 한국에서는 유치원에서 문화 강사로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임신으로 일을 중단하게 되었다.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빨리 경제활동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또한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대학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2025)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와 공연예술가로 5년 동안 일했다. 물론 일이 매우 힘들고 때로는 고용주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예술 활동을 통해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었다. 학생 때부터 공팀을 만드는 것을 꿈꿔왔는데 한국에서도 그 꿈을 이루길 바라고 있다. 단순히 일하면서 사는 것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술 활동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만들고 싶다." 미아 모하마드 수몬은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이자 퍼포먼스 공연팀 멤버이다. 한국에서 5년가까이 일한 후 비자만료로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가 팬더믹으로 한동안 비자를 재발급받지 못했다. 다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퍼포먼스 공연팀으로 활동 중이다. 수몬과 동료들은 거리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공연과 더불어 사업장 이동의 자유와 이주노동자 권리향상, 인종차별 반대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1)
“코로나사태 이후 한동안 공장과 숙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했다. 고용주는 외출을 허용하지 않았고 고용 주 말을 거스를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숙소에 갖혀 지 내야 했다. 주방도 화장실도 없는 좁은 방에서 세 명이 함께 지냈다. " Rashed Al Mamun는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들이자 이주민 인권 활동가들이 결성한 다원예술 공연팀 Frame 2 의 멤버이다. 공연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 차별 실태를 알 리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연습을 위해서는 천안에서 서울까지 일요일마다 오고 가야 한다. 주 6일 고된 공장일을 하고 유일한 휴일에 서울에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먼 거리를 이동한다. 이주노동자 인권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옮은 일을 하 고 있다고 생각해서 피곤하지 않다고 있다. 고용주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험하게 말하지 말고 인간으로서 존중해주길 바라고 있다. (2021)
Saffron Reign은 벨라스크와 드랙킹을 결합한 소위 ' 드래그-라스크' 공연자이다. 본인이 직접 제작한 의 상을 입고 캐릭터를 창조하며 공연을 펼친다. 여유있고 유머러스하게 공연을 펼치지만 사실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유머와 도발이 넘치는 무대를 만들며 이러한 공연은 실제 삶에서도 자신감을 북돋아준다. 그의 공연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다. 신체를 들어내는 벨라스크 공연자로 젠더 아이덴티티나 이란 혈통인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 공연한 적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연에 담긴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상대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체에 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다. (2021)
베네주엘라 출신인 Maria Fernanda Silva는 한국에 오기전부터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처음에는 K팝과 같은 한국의 대중문화를 좋아했지만 학사까지 마치고 대학원 과정 중인 지금은 전통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주로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지만 한국의 전통악기나 공연도 꾸준히 배우고 있다. 대학 공연학과의 권위적인 분위기를 접했을때 당황하기도 했지만 한국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되고 지금은 모든 상황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0년 가까이 살면서 한국을 집처럼 생각한다는 그녀는 공연을 통해서 한국인과 외국인의 구분없이 인간으로서 공감을 느끼게 되길 소망한다. (2021)
"매일 집에 가고 싶고 가족을 만나고 싶다." 미얀마에서 한국에 온지 10년 차인 MYO MIN TUN은 미얀마의 군사쿠테타 이후,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뒤 군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인도적 체류로 한국에 거주 중이지만 고용비자가 없어 여러 불이익을 감당한다고 한다. 미얀마가 빨리 민주화되어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2024)
Carlo Oliver는 90년대에 한국에 와서 35년 동안 이주노동자로 살았다. 처음에는 철공소에서 일했으며, 이후 염색 공장을 거쳐 현재는 자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필리핀인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한국어 소통이 어려웠고, 문화 차이도 커서 한국 생활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일터에서 때때로 인종차별을 경험한다고 한다. 카를로는 90년대부터 필리핀 노동자 연대에 참여해왔다. 이주노동자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서로 연대하여 돕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잊지 못할 경험으로는 이주민 인권을 위한 집회에 참여한 것을 꼽는다. 미등록 이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함께 한 것을 의미 있는 행동으로 여기고 있다. 카를로는 한국에서 반려자를 만나 결혼했다. 대사관에서 간단히 문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대신했다. 현재 가족들은 모두 필리핀에 있으며, 두 자녀는 각각 대학에서 건축학과 치의학을 전공 중이다. 먼 곳에서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명절에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낀다고 한다. (2025)
"정의는 기도와 염원만으로 이룰 수 없다. 변화를 위해 참여해야 한다." 에드윈과 줄리엣는 필리핀에서 온 목사부부이다. 필리핀에서 두 사람은 진보적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 지역 커뮤니티에서 봉사하기 위해 농촌에서 목회활동을 했었다. 2024년 에드윈은 갑작스럽게 군인들에게 체포당한다. 군인들이 에드윈이 반정부세력에 동조했다고 주장하자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필리핀 법원에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한국 기독교 장로회의 도움으로 목회자로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에드윈은 자신이 체포당한 이유로 평소 부패한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과 농촌 지역 커뮤니티에서의 활동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현 필리핀 정부는 지역민에 영향력이 있는 종교인은 잠재적 위협으로 본다는 것이다. 매년 필리핀에서는 수 많은 인권운동가들과 종교인들이 체포되거나 의문사한다. 2025년 현재 두 사람은 필리핀 이주민들의 커뮤니티가 있는 서울 장위동에 거주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는 한국어를 공부해서 지역 사회에 필요한 교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두 사람에는 필리핀에 두고 온 대학생 딸이 있는데 딸 역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 (2025)
"정의는 기도와 염원만으로 이룰 수 없다. 변화를 위해 참여해야 한다." 에드윈과 줄리엣는 필리핀에서 온 목사부부이다. 필리핀에서 두 사람은 진보적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 지역 커뮤니티에서 봉사하기 위해 농촌에서 목회활동을 했었다. 2024년 에드윈은 갑작스럽게 군인들에게 체포당한다. 군인들이 에드윈이 반정부세력에 동조했다고 주장하자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필리핀 법원에 신변보호를 요청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 사람은 한국 기독교 장로회의 도움으로 목회자로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에드윈은 자신이 체포당한 이유로 평소 부패한 정부에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과 농촌 지역 커뮤니티에서의 활동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현 필리핀 정부는 지역민에 영향력이 있는 종교인은 잠재적 위협으로 본다는 것이다. 매년 필리핀에서는 수 많은 인권운동가들과 종교인들이 체포되거나 의문사한다. 2025년 현재 두 사람은 필리핀 이주민들의 커뮤니티가 있는 서울 장위동에 거주하며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는 한국어를 공부해서 지역 사회에 필요한 교회를 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두 사람에는 필리핀에 두고 온 대학생 딸이 있는데 딸 역시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 (2025)
Satyajit. V. Dimaano (쳇)은 1994년에 한국에 와서 20년 가까이 살며 자수 공장에서 일해 온 베테랑 노동자다. 동시에 이주민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국제 이주민 연대와 필리핀 노동자 연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90년대부터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변화를 직접 체험했다. 특히 당시 필리핀보다도 훨씬 심했던 한국의 가부장적인 문화에 놀랐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계엄령을 경험한 세대였기에 2024년 계엄령 사태에도 한국사회의 반응에 관심을 기울렸다. 그는 젊은 시절 정치학을 전공했고, 계엄령이 선포된 필리핀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이런 경험으로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관심이 많으며 스스로도 이주민 인권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다.특히 한국인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일하며 경제 발전에 기여한 미등록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한다.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조에 놓인 미등록 이주민들이 사회적 낙인과 인권침해, 강제추방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2025)
Jones Galang는 필리핀 출신의 선교사이자 인권운동가다. 젊은 시절의 그는 필리핀 독재정권에 맞서 시민운동에 투신했다. 2000년초, 필리핀 이주노동자를 돕고 싶었던 한국 기독교 장로회는 존스 갈라를 한국에 초청했다. 그 후 현재까지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도움을 요청하는 이주민들을 찾아간다. 심지어 제주도에서도 그에게 연락이 온다고 한다. 존스는 임금 체불과 노동 착취로 고통받거나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불이익을 겪는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또한 가정폭력을 경험한 결혼 이주 여성에게 쉼터를 제공하거나, 미등록 이주민을 위한 의료 지원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필리핀의 계엄령 세대였던 그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2024년 계엄령 사태 당시 큰 충격을 받았고, 그날 직접 국회 현장을 찾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스는 한국 사회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다. 20년 동안 한국에 살며 그는 점점 포용적이고 진보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더 나은 제도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 모두가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기를 바라고 있다. (2025)
"아이들이 세상을 인간을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 됐으면.." 쓰리랑카 출신 Chamikara는 2005년에 한국에 와 20년 가까이 거주 중이다. 처음 취업했을 때는 직장에서 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 때문에 욕부터 배웠다. 이주민 센터의 자원봉사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한국에도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도움 받은 것을 돌려주는 마음으로 이주민센터 대표로서 다른 이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전 직장에서는 경력에 비해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직하면서 1년 반만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아내 Pathipujika는 2015년에 한국에 왔으며 두 아이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다. 법적으로 Pathipujika 직업을 가질 수 없다. 남편이 비전문취업비자 (E-9)에서 시작해서 거주비자(F-2)비자까지 받는데 성공했지만 이민법상으로 영주권이 없으면 배우자는 직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20년간 성실하게 살아도 연봉 8400만원이 되지 않으면 영주권을 얻을 수 없고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거주비자로는 가족들은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갱신에 실패하면 한국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국제적 기준에 맞춰 이민정책을 포용적으로 개선하여 이주민 가족들도 평등한 해택을 얻길 바라고 있다.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