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과잉된 에고는 파멸적인 행동을 초래하거나 적어도 미국의 국익과 한국의 신정부에 매우 당혹스러운 행위로 이어질 위험이 존재한다."
"The danger exists, however, that Rhee’s inflated ego may lead him to action disastrous or least highly embarrassing to the new Korean Government and to the interests of the US."
CIA,  Personality of Syngman Rhee, Prospects for the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ORE 44-48, Published 28 October1948






이 시리즈는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이승만이 고립되어 서 있는 작품의 배경은 대구 인근으로 이지역은 보도연맹 최대 학살지이다. 두 번째는 4월 혁명 당시 경무대(당시 대통령 관저)를 배경으로 벌어지던 사건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 두 이야기로 나는 약자의 희생을 당연시했던 이 봉건시대 지배자의 가면을 쓰고 타인의 고통과 마주보려 하였다. 









경산에서
 Gyeong San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 군, 경은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중 상당수를 적법한 절차 없이 대구 인근에 위치한 경산 코발트광산과 가창 골짜기 일대에서 집단사살하였다.  보도연맹은 좌익을 우익으로 전향시키기위해 세운 단체로 가입인원은 35만여명에 달했으나 상당수는 이념과 상관없는 평범한 농민들이었다. 한국전쟁 개전 이 후 북한군 공세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하던 이승만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의 즉별처분을 지시했다. 

경산에서 발생한 희생자 수는 1,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인근 주민들의 진술에 따르면 50명씩 태운 트럭이 하루 5트럭씩 6일간 계속 왔으며 계곡은 핏물로 물들었고 주민들은 이 광산을 해골 광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가창골에서 
Ga Chang Gol
가창골 일대는 댐의 건설로 인한 수몰로 학살의 실태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댐 건설 당시 무수한 유골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경찰은 일꾼을 시켜 긴 골을 파거나 학살피해자들에게 직접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총살 후 시체를 암매장하였다.

굴골산에서
Gool Gol Mauntain
1948년 대구굴골산(현재 허브힐즈)에서 땔감을 구하던 주민 셋이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사망하였다. 사건의 목격자는 사복 경찰들이 보자기에 총을 숨기고 조를 짜서 산을 포위하며 올라왔으며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좌익혐의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이 확인절차 없이 발포하여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창골에서
Ga Chang Gol
"가창골에서 처형이 있은 후 특경대장(당시 경감)의 지시로 특경대원 80명이 3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현장을 확인하러 간 적이 있다. 사건현장에는 처형될 사람들이 직접 팠던 3개의 구덩이가 있었으며 각 구덩이마다 약 100여명정도 그러니까 총 300여명이 묻혀 있었다."
참고인 오ㅇㅇ의 면담보고서(2009. 6. 11), 대구, 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Ga Chang Gol - Choi Neung-jin and Rhee Syngman

우익 성향의 독립운동가였던 최능진은 독립 이후 경찰 간부가 되었으나 부패한 경찰조직을 내부비판한 후 경무국장 조병옥에 의해 파면된다.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 측근들의 정치공작으로 후보자격을 박탈당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는 정치보복으로 쿠테타 혐의를 뒤집어쓰고  5년형을 선고받는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평화운동을 시도하였으나 북한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 일로 한국군의 서울 수복 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51년 2월 11일, 경북 대구시 가창면에서 총살당한다.



 

병풍산에서
Byeong Poong Mauntain

대구병풍산에 위치한 중석 광산은 지금은 흔적만 남은 폐광이지만 한때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광산 중 하나였다. 전쟁 당시, 숲 가운데 위치한 화약창고 인근과 당시 사무실 위의 계곡, 두 지점에서 학살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화약창고로 트럭 6-7대에 사람들이 실려 왔다고 하며 300-35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장소에서 학살된 민간인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목격자는 "한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라고 증언한다.



 What Does That Mean "If People Want".
'국민이 원한다면'이란 무슨 의미인가?

경무대에서 쫓겨나기 전 이승만은 미군정으로부터 사퇴압력에 시달렸다. 미국이 이승만을 경멸하면서도 지난 12년간 지원한 것은 한국전체를 멸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나라의 지도자로 이승만 정도의 파시스트가 적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960년 4월, 부정선거로 촉발된 시민혁명 이 후 태도를 바꿔 이승만에게 사퇴를 압박했다. 4월 26일 하야성명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라고 발표하자 미군 사령관과 미 대사가 경무대에 찾아와 성명서의 모호함을 지적한 뒤 완벽한 사임을 요구하였다.


이기붕 일가의 자살
Suicide of Lee's Family

자신의 권력이 견제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병약하고 유한 성격의 이기붕을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이승만의 신임을 받은 이기붕은 자유당 의장과 민의원 의장에 연이어 선출되었고 3대 정, 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국민들은 '국부'로 불리던 이승만을 대신하여 부패한 권력의 2인자인 이기붕을 비난하였다. 1960년 4대 정, 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선거유세를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기붕을 다시 한번 부통령 선거후보로 선택한다. 야당의 대선후보였던 조병옥이 병으로 급사하자 사실상 재선이 확정된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측근들에게 대규모 부정선거를 기획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민혁명으로 이어지고 시위대에게 자택을 포위당한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로 피신한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 4인은 경무대 관사 36호에서 장남 이강석의 총구로 목숨을 끊는다. 


Condemned Men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뒤 아무런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은 체 그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낸다. 이승만을 대신하여 댓가를 치룬 이들은 부정선거를 지휘한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시민에게 총격을 지시한 경무관 곽영주였다. 이들은 1961년 혁명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Rhee fled the country and lived the rest of his life in exile in Hawaii in order to avoid taking responsibility for his political choices. In his stead, Choi In-gyu, the Secretary of the Interior and the architect behind the rigged election, and Gwak Young-gyu, the Assistant Commissioner who issued orders to open fire to the protesters, were executed. 

The Face of Rhee
 The Face of Rhee
리의 얼굴





참고 자료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 제2부 제2소위원회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국민보도연맹 사건, 제2부 제2소위원회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대구, 경북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제2부 제2소위원회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대구, 고령, 성주, 영천 민간인 희생 사건, 제2부 제2소위원회 사건, 진실화해위원회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제3부 제3소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최씨 등록연기접수는 선거법 위반아닌가, 시선위 조치에 비난자자, 동아일보, 1948-04-22
최능진에 삼년구형, 경향신문, 1949-10-10
이기붕일가 권총자살, 동아일보, 1960-04-29
세명의 쏘파에 나란히, 1960-04-29
학살장소를 확인, 경향신문, 1960-06-05
"6.25 직후 국군 후퇴때 집단 총살, 수장" "보도연맹사건' 묻혀진 진상, 한겨레, 1990-06-24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56, 최능진 친일파 숙청 주장한 미군정 경찰간부, 한겨레, 1991-01-25
4.19에서 이승만-매카나기 숨가쁜 경무대 대화록 하야까지, 경향신문, 1995.02.03
이승만 정권이 총살한 '독립운동가 최능진', 64년만에 '무죄' . 2015-08-27
"독립운동가 고 최능진 이승만 정권 총살 부당" 경향신문, 2009-09-16
한국전쟁 중 이적죄로 사형... 최능진 선생 65년만에 무죄 확정, 경향신문, 2016-06-28
6.25 전쟁의 불편한 진실 대구 '가창골 학살' 재조명, 영남일보, 2014-10-10
65년 만에 드러난 대구 달성광산 학살 "한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민중의 소리, 2016-06-13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권, 서중석, 김덕련 저, 오월의 봄
조봉암과 1950년대 상/하,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이승만과 제1공화국,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이승만의 대미투쟁 상/하, 로버트 T. 올리버 저/한준석 역, 비봉 출판사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브루스 커밍스 저 / 김동노 등역, 창비
독부 이승만 평전, 김상웅 저, 책보세
Prospects for the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ORE 44-48, Published 28 October1948, 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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